
긴 영화에 인터미션을 넣자는 제안은 얼핏 합리적으로 들린다.
세 시간 넘게 앉아 있으면 화장실도 가야 하고 허리도 아프다. 잠시 쉬었다 보면 후반부 집중력도 나아질 수 있다.
그래서 “두 시간 반이 넘으면 의무적으로 10분쯤 쉬게 하자”는 말은 관객 친화적인 상식처럼 보인다.
문제는 인터미션이 단순히 재생을 잠깐 멈추는 기능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어디에서 흐름을 끊고, 무엇을 전반부의 종점으로 만들며,
관객을 어떤 감정 상태로 내보냈다가 어떤 장면으로 다시 불러들일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막간은 상영 편의가 아니라 영화의 시간 구조를 새로 만드는 편집이다.

고전 대작들이 인터미션을 사용했을 때도 러닝타임이 길어졌으니 중간을 대충 잘라 넣은 것이 아니었다.
각본 단계에서부터 전반부의 상승과 정점, 음악의 마무리, 후반부를 다시 여는 리듬이 함께 설계됐다.
[벤허]나 [아라비아의 로렌스]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의 막간은 영화 바깥에서 붙은 휴게시간이 아니라 작품 안에 포함된 하나의 장면에 가깝다.
반대로 인터미션 없이 만들어진 영화에 극장이 임의로 휴식을 삽입하면,
그것은 러닝타임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라 감독과 편집자가 만든 호흡을 제3자가 제멋대로 다시 재단하는 일이 된다.
세 시간이라는 숫자는 영화가 얼마나 긴지는 말해주지만, 어디에서 잘라도 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플라워 킬링 문]을 둘러싼 갈등이 그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영화는 3시간 26분 동안 멈추지 않도록 제작됐지만 일부 극장은 관객 편의를 이유로 중간에 임의의 인터미션을 넣었다.
극장 쪽 사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긴 상영을 감당하기 어려운 관객이 있고, 휴식 뒤에 더 또렷한 정신으로 영화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스코세이지에게 “이 영화에는 막간이 필요했다”고 비판하는 것과 극장이 실제 상영본에 막간을 만들어 넣는 것은 다른 행위다.
전자는 작품에 대한 평가이고, 후자는 작품의 리듬을 대신 편집하는 일이다.
관객 편의를 위한 선의가 있었다 해도 그 선의가 곧 편집권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더구나 관객에게는 이미 한 가지 선택이 있다. 정말 화장실이 급하거나 몸이 불편하면 잠시 나갔다 돌아오면 된다.
물론 몇 분을 놓친다는 손실은 생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몸의 상태에 따라 자신이 고른 순간에 감수하는 손실이다.
인터미션을 의무화하면 모든 관객이 극장이 정한 같은 지점에서 강제로 영화 밖으로 밀려난다.
접근성을 위해 휴식 상영 회차를 별도로 마련하거나, 제작진이 동의한 인터미션 버전을 제공하는 방식은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
다만 그 선택지를 늘리는 것과 모든 장편영화를 일정 시간마다 자동으로 자르는 규칙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세 시간짜리 영화는 당연히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세 시간이기 때문에 지루한 것은 아니다.
90분짜리 영화도 끝없이 늘어질 수 있고, 네 시간짜리 영화도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만들 수 있다.
물어야 할 것은 시간이 축적되는가, 제자리에서 반복되는가다.
누군가는 그 체류를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때 필요한 비판은 “길다”가 아니라 “그 긴 시간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다.
전자는 상영 정보이고, 후자가 비로소 작품에 대한 판단이다.

[아바타] 시리즈의 제임스 카메론이 러닝타임 논란에 보인 능청스러운 태도는 그래서 흥미롭다.
화장실이 급하면 그냥 다녀오라, 놓친 부분은 다음에 다시 와서 보라는 농담을 했고,
짠 팝콘을 먹으면 삼투압 때문에 소변이 덜 마렵다는 식의 너스레까지 떨었다. 거만하고 장사꾼 같은 말로 들릴 여지는 충분하다.
그래도 창작자로서 그는 두 극단을 피해갔다.
“내 영화니까 꼼짝 말고 견뎌라”며 관객의 몸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요즘 관객에게 맞춰 두 시간 안으로 줄이지 못해 죄송하다”며 영화가 길어진 사실 자체를 결함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영화는 세 시간으로 남겨두되, 관객에게 완주를 자격시험처럼 강요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긴 무중단 상영은 노약자나 장애가 있는 관객, 방광과 허리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 실제 장벽이 될 수 있다.
이 문제를 예술을 위해 참으라는 근성론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다만 접근성의 해법은 모든 영화의 시간을 동일하게 다시 편집하는 데 있지 않다.
“세 시간이 넘는다”, “숏폼 시대에 누가 세 시간짜리 영화를 보느냐”는 말은
영화가 그 시간을 무엇에 썼는지 따지지 않은 채 길이 자체를 결함으로 만든다.
숏폼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짧은 영상을 많이 소비한다는 뜻이지,
모든 예술이 가장 빨리 넘겨지는 형식의 속도에 복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관은 휴대전화의 단속적인 시간과 다른 호흡을 제공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도 있다.

관객은 긴 영화를 끝까지 버틸 의무가 없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영화도 관객의 편의를 위해 일정 시간마다 잘려야 할 의무는 없다.
인터미션은 필요할 수 있지만,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디에든 삽입할 수 있는 중립적인 버튼은 아니다.
긴 영화가 비판받아야 한다면 길어서가 아니라, 그 길이를 영화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어야 한다.